Bill Gates




Video: Microsoft Bill Gates Looking back moving ahead_long머... 참고삼아 올려보는거지.
암턴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거대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낸거니 대단한 인간임에는 두말할 나위 없겠지요.
충분히 존경해마지할 가치가 있겠다 하겠습니다.

by 이안애비 | 2008/07/22 14:48 | 경영경제일반 | 트랙백(2) | 덧글(0)

김수진대표 다른 인터뷰

일일 관객 수가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추격자>의 흥행기세로, 제작자인 김수진 영화사 비단길 대표는 축하전화를 받기 바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로 걸고 만든 영화는 최근 <음란서생>(2006)과 <추격자> 두편이지만, 그에게 축하전화를 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김수진 대표가 지난 20년간 영화계에 몸담고 지내면서 알아온 지인들이거나 사업 파트너들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영화일을 시작한 김수진 대표는 당시 하명중영화제작소, 신도필름 등을 거쳐 20대 초반에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회사를 꾸릴 만큼 이미 당찬 사업가였다. 그는 <꽃잎> <나쁜 영화> 등 한국영화 기획에 참여했고 <레옹>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영화를 수입해 흥행시켜서, 한국에 짧게 프랑스 예술영화 수입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올해로 영화일을 한 지 꼭 20년이 된 그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충무로 원로”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듣지만, 6년여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본격적인 제작에 뛰어든 신인 제작자이기도 하다. 1966년생. 이제 한창 일할 때인 젊은 여성제작자로서 김수진 대표를 두고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뭘 해도 할 사람”이라는 것.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분명한 불같고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의 주변 사람들도 호불호로 갈리가 한다는 김수진 대표를 만나기 전, 다소 두려운 맘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햇볕 좋은 홍대 부근의 작은 카페에 들어앉아 호랑이 한 마리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으나, 그곳에 나타난 건 경쾌한 초록색 스웨터에 트레이닝 점퍼 차림을 한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오늘은 머리도 감고 빗질도 하고 왔다”며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머릿결을 매만지던 김수진 대표는, <추격자> 제작과정을 비롯해 길고 곡절 많은 개인사를 세 시간 동안 빠르게 쏟아놓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뭘 쉽게 얻을 운은 아닌가봐요. 그런 행운은 나한테 없는 것 같아. 편안한 걸 할 팔자가 아닌 거지.”

-오늘(2월27일) <추격자>가 200만명을 넘었다. 무엇보다도 평일 관객이 많은 분위기다.
=어제도 하루 동안 12만명이 들었다고 그러더라. 지난주 화요일엔 10만명이었으니까 늘어난 셈이다.

-어떤 기사에선 벌써 본전 다 뽑았다고 그러던데.
=이제 시작이다. 아직 손익분기점도 못 넘었는데.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순제작비가 정확하게 37억5천만원 들었고, P&A비용이 20억원 정도 들 것 같다. 프린트 수가 계속 늘고 있어서.

-현재 스크린 수가 몇개나 되나.
=450개다. 개봉할 땐 400개로 했다.

-처음부터 개봉 규모가 작진 않았다.
=쇼박스에서, 우리가 이 영화는 책임지고 벌여주겠다고, 그렇게 믿고 기다려준 팀이 감사하고. 그동안 투자사들한테 얼마나 까였는지. 그거 다 얘기 하려면… 진짜 할 말 많다. (웃음)

-어떻게 <추격자>를 만들게 됐는지 그 얘기부터 하자.
=2005년 여름 <음란서생> 촬영 직전에 <완벽한 도미요리>를 봤다.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받은 그 영화. 그걸 보고 (갑자기 저돌적으로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찌르며) “저 감독 무조건 잡아와! 무조건 잡아!” 그랬는데 마침 <음란서생> 제작실장이 그 영화 PD를 해준 거라. 그래서 운 좋게 얼른 잡아올 수 있었다. (웃음) 나홍진 감독에게 뭘 준비할 거냐 그랬더니 그전에도 다른 아이템들로 여러 제작사와 계약을 했는데 다 잘 안 됐다며 나 감독이 풀이 죽어 있더라. 김선일이나 유영철을 소재로 얘기하면서 자주 만나다가 <음란서생> 개봉 직전에 감독이 초고라며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자기가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골방에서 오랫동안 혼자 썼다고. 그걸 저녁을 시켜놓고 읽는데, 읽다가 토할 뻔했다. 숨이 막히고 너무 세고 잔인하고. 문자화된 걸 읽는데도 긴장감이 넘쳤고. 그래서 결국 그 밥을 못 먹고 전화했다. 이거 하자.

-<추격자>와 같은 아이템을 하자고 감독에게 먼저 얘기 건넸던 건가.
=감독이 그런 얘길 쓰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초고를 보고 같이 하자 얘기했던 거다. 어쨌든 시나리오는 많이 고쳐야겠다, 어렵겠지만 나를 믿고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날 우리 회사에서는 모두가 다 반대하는 거야. 영화가 너무 세고 잔혹하고, 유영철 얘기도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모두가 다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나는 유영철이 누군질 몰랐다. 그 시기에 미국에 있었으니까. 그게 뭐냐? 유영철을 왜 반대하는 거야? 인터넷 쳐봤더니 극악무도하더만. (웃음) 반감을 가질 것 같더라. 그래도 나는 (또 손가락을 찌르며) “고!” 했지. 그날부터 나 감독과 같이 신 바이 신, 지문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서 이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냐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일년 내내 회의했다. 중간에 물론 각색자도 붙였다.

-뭘 고쳐야 했나.
=초고의 느낌이 지금 영화로 보여지는 것과 근간은 다르지 않은데, 중요한 네개의 포인트가 크게 바뀌었다. 나 감독의 초고는 규모가 작은 하드코어 잔혹스릴러였다. 사적인 느낌이 컸고. 거기에 사회적인 이슈들도 찾아넣고 심리적으로도 사이즈가 큰 영화로 보일 수 있게,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넓힌 거다. 그 과정에 일년이 걸린 거지. 나는 몰랐는데, 최근에 누가 나한테 그러기를, 진짜 옆에서 보기 질릴 정도로 물고 늘어졌더라고 하더라. 저러다 말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집요했다고. (웃음) 나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
=출장안마사 얘기는 기본적으로 사회 밑바닥 얘기다. 남들이 별로 관심 안 갖는 그런 사람들이 죽어갈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희생자들이 죽어간 이유는 결국 모두가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경찰도 안일했고 하다못해 개미슈퍼 아줌마도 안일했다. 그런 걸 사회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으면 영화는 작은 스릴러가 되고 만다. 유영철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화가 났던 게, 그 여자들이 죽어가던 당시 아무도 제대로 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건 그들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이 다른 계층에 속했으면 경찰도 사건을 더 파고들었을 거고 사회도 더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고작 출장안마산데 뭐, 이러면서 무시하고 넘어간 게 아닌가 싶더라.

-투자사들한테는 왜 그렇게 ‘까였다’고 생각하나.
=연쇄살인마, 출장안마사, 영화 90%가 밤신, 60%가 비신. (웃음) 투자받으러 다니던 2006년 그해가 한국영화 수익률이 바닥을 쳤을 때여서 더 어려웠다. 그때, 알고 지내던 김선용 이사가 밴티지 홀딩스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맘에 줬더니 얼른 하겠다더라. 갓 만들어진 투자사라 유연한 장점이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42억원 정도는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선 30억원이면 찍겠다는 거야. 줄이고 줄여도 31억5천만원인데. 그래서 이건 무조건 오버다, 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캐스팅은 그 이후에 된 건가.
=캐스팅이 먼저 됐다. 그게 2007년 1월인데, 당연히 캐스팅도 잘 안 됐지. (웃음) 만날 그 고민에 살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그전에 심엔터테인먼트에서 자기네 배우들 사진이 있는 달력을 준 게 있었는데, 눈을 딱 뜨니까 눈앞에서 김윤석씨가 활짝 웃고 있는 거다. (웃음) 김윤석씨 생일이 1월이거든. 그 사람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저거다, 됐다, 싶더라. 미진 역은 초고 때부터 서영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고, 영민 역으로는 하정우를 하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너무 좋았고, 굉장히 큰 배우가 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근데 투자사에서 하정우는 죽어도 안 된다는 거라. 스타를 써야 한다는 거였다. 두달을 밀고 당기다가 투자사에서 자기네가 다른 스타 캐스팅을 해오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날 나는 난리를 치면서 전화기 집어던지고 (집어던지는 시늉) 당장 투자 빼라 그랬다. 그랬더니 이젠 거기가 뒤집어진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고 황당해했지. 요새같이 어려울 때 투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도 다른 투자사들한테 다 퇴짜 맞고 왔으니 그쪽에서 투자 빼면 대안이 없거든. (웃음) 일주일 있다 연락이 왔다. 그냥 하정우 하세요. 투자사가 양보해줬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하정우도 이 배경을 알고 있나.
=촬영 50%쯤 지났을 때, 김윤석씨랑 하정우씨랑 같이 술 마시는데 갑자기 하정우씨가, “저 이전에 영민을 누구 생각하셨어요?” 하고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걸 왜 물어보냐 그랬더니 항상 궁금했는데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더라. 자기가 제일 늦게 합류했으니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던 거다. 그래서 그 얘길 해줬다. 그랬더니 정우씨가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웃음) 내가 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고집 부려서 정우씨를 캐스팅했는데 정우씨 연기 꽝이었으면 나 완전히 바보 되고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영민이 망원지구대에 끌려가서 진술서 쓰다가, 여자들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 할 때 그 장면 보고 모든 걱정을 놨지.

-미진 역은 왜 처음부터 서영희였나.
=예전부터 서영희씨 눈빛이 되게 슬프고 불행해 보인다고 느껴왔다. <마파도> 보고 그걸 느꼈다. 참 운이 없구나. 불행하고 억울한 느낌. 그런 사람이 미진 역할을 하면 사람들이 연민도 많이 느낄 것 같았다. 영희씨도 처음엔 걱정하긴 했는데 무조건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여자배우들은 되게 몸 사리잖아. 근데 영희씨는 몸 사리는 게 없더라고. 힘들어서 도망갈 줄 알았더니 안 도망가데. (웃음)

-촬영기간 동안 나홍진 감독은 제작자에게 자기가 헛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중간 편집본을 가져갈 때도 최종편집본처럼 편집이니 색보정에 공을 들였다던데.
=나는 이 영화 찍는 동안 매일 아침 텔레시네 보는 재미로 일찍 출근했다. 텔레시네는 편집은 고사하고 사운드고 뭐고 하나도 안 된 거잖아. 그것만 보는데도 내가 생각하는 그림 그대로 다 찍혔다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시네 본 지 사흘쯤 됐을 때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더라.

-걱정했던 부분이 뭐였나.
=밤신이 너무 많고, 감독이고 촬영감독이 모두 신인이라 너무 실험적이거나 스타일적으로 과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정말 클래식한 앵글에 공식 그대로 찍어왔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액션과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나 감독은 어떻게 숏을 찍고 붙여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지 정말 잘 아는 사람이다. <완벽한 도미요리>를 보고 좋아한 것도 그 점이었다. 숏을 찍어서 붙이는 감각이 정말 뛰어나다. 미드 세대라 그런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70년대생 이후의 영상세대라고 할 만하다. 그 이전 세대엔 없었던 컷 감각인 것 같다. 김선민 편집기사가 잘해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 감독이 그렇게 되게끔 찍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제목은 어떻게 짓게 됐나.
=제목도 없는 시나리오를 나 감독이 가져와서, 제목은 지어주세요, 했다. (웃음) 제목 갖고도 진짜 말이 많았다. 고전적으로 힘있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중호의 마음을 담고 싶었고. 그래서 어느 날 ‘추격자’로 정했더니 또 모두가 반대하고…. (웃음) 나 감독도 추격과 추적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자기가 일주일만 고민해보겠다 그래서 내가 그냥 ‘추격자’로 가, 오늘부터 제목 갖고 얘기하지 마. (웃음)

-프로덕션의 면면에 있어서 영화 그 자체로 승부하고 돌파하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정공법.
=처음부터 그랬다. 스타 캐스팅 가지 말고 연기자로서 적역 캐스팅으로 가서 캐스팅 비용 들어갈 거 영화에 더 쓰고, 정통적으로 홍보하고 마케팅하고. 하다못해 우리는 연예프로에서도 다 까였다. 쇼프로 같은 거, 우린 나간다고 하는데도 그쪽에서 배우들이 너무 약하다고 안 내보내주더라. (웃음) 그래서 그쪽으로는 홍보도 하나도 못했다. 영화 제목도 장난 안 치고, 무식하지만 촌스럽게 가자. 모든 과정이 다 그랬던 것 같다. 편집할 때까지도 나 감독과 논쟁을 많이 했거든.

-감독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대. (웃음)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이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충돌했을 때 그를 설득시킬 수 있으려면 내가 감독보다 시나리오 더 많이 보고 콘티 더 많이 보고 고민도 더 많이 해서 논리로 승부해야지. 그 사람은 감독인데 얼마나 고민했겠어. 이미 머릿속에 확고한 그림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감독은 편집실 뛰쳐나가고, 나는 달래서 데려오고, 중간에서 김선민 기사는 어쩔 줄 모르고.

-그래도 한편쯤은 더 같이 해야 하지 않나.
=애초에 세편 계약했는데 안 할지도 몰라. (웃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편집할 때까지 징그럽게 싸워서. 내 생각은 이렇다. 신인감독이 영화 잘 만들어서 500만명 들고 대성하면 메이저 투자사들이 돈 덥석 주고 데려간다. 크리에이티브 자유 다 줄게, 돈 다 줄게, 하면서. 그러면 두 번째 작품 가서 깨진다. 영화는 제약과 조절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돈 다 주고 자유 다 주고, 그렇게 해서는 영화가 될 수가 없다. 편집하는 2주 동안 그래서 진짜 괴로웠다.

-편집을 2주 했나.
=모든 후반작업을 한달 만에 했다. 처음에 개봉일 얘기할 땐 쇼박스에 내가 우리 영화는 개봉을 무조건 구정으로 가야 한다, 1월30일로 하자고 했는데 촬영이 지연됐잖아. 다시 찾아가서 2주만 늦춰달라 그랬는데도 후반작업할 시간이 한달밖에 안 남은 거다. 그러니 나 감독은 이가 갈리지. (웃음) 자기는 한달 내내 밤새고 나는 옆에서 안 떨어지고.

-첫 제작영화인 <음란서생>도 성공작이었다.
=평 좋았고, 관객도 267만명 들었고. 근데 아직도 수익금이 안 들어왔다. 그게 일본에 120만달러에 팔렸는데, 그 수익이 영화가 개봉해야 들어오는 거다. 근데 영화가 아직 개봉을 안 했다. 3년 내내 빚지고 산 거지. 그래서 <추격자> 잘돼서 빚이라도 갚았으면 좋겠다. (웃음) <음란서생>은 국내극장 수입으로는 제작비 똔똔했다.

-<추격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들 것 같은가.
=그건 잘 모르겠고, 순전히 개인적인 바람인데 500만명은 넘어줬으면 좋겠다. 500만명은 넘어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남들 다 안 된다고 했던 영화가 이렇게 나와서 500만명은 넘어줘야 지금의 한국영화 투자환경이 바뀌는 데 조금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400만명도 좋고 300만명도 좋지만, 이상하게 500만명이 안 넘으면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쉽게 잊혀지는 것 같더라. 오래 기억에 남고 투자 마인드도 바꾸려면 500만명은 넘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500만명이 넘어야 연말에 상도 탈 거 같아. (웃음) 윤석씨, 정우씨 다 상 받았으면 좋겠고 나 감독님도 받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나는 빚 갚으면 좋을 것 같고. 한쪽에선 부담도 된다. 주위의 기대가 너무 커져서 다음 작품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 그래서 <작전>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계는.
=시나리오 고치는 중이다. 똑같다. 신인감독이고 스타 캐스팅 안 할 거다. 이번에도 매니지먼트사에서 달력 꼭 줘야 돼. (웃음)

-어떤 내용인지.
=주식 갖고 사기치는 사람들 얘기다. 무지하게 재미있다. 대한민국에서 요즘 펀드 안 갖고 있는 사람 없잖아. 나는 주식을 한번도 안 해봐서 아는 게 전혀 없지만 공부는 안 하고 있다. 나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어야 하니까.

-일찍부터 영화계에서 일했다. 90년대 중반에 본인이 대표로 운영했던 영화기획정보센터라는 곳은 채윤희 대표의 올댓시네마와 함께 홍보마케팅의 양대산맥이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웃음) 그러다 1999년 AFI(미국영화학회)로 유학을 떠났는데, 무엇을 배우러 간 것이었나.
=인생이… 이런 얘길 다 해야 하나. (웃음) 철없을 때 결혼했던 남편이 부도를 내고 도망갔다. 당시 6억5천만원이었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수입해서 번 돈, <레옹> 수입해서 번 돈, <나쁜 영화> <꽃잎> 이런 영화들 기획, 제작해서 번 돈으로 그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인생이 너무 허망하더라. 공부라기보다, 이젠 남을 위해 살지 말고 나 자신에게 투자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갔다.

-조엘 실버가 운영하는 실버프로덕션에서도 일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인턴을 잡으려고 팩스를 1천 군데 정도 넣었다. 전화가 한통도 안 왔다. 근데 실버네가 전화했다. 지금 바로 와줄 수 있냐 그러더라. 우리 너무 급하다고. 오케이, 바로 가겠다, 하고 갔는데 처음 두달은 복사만 했다. (웃음) 한국에서 영화 제작하고 기획하던 사람이 만날 매니지먼트사 전화하고 팩스 보내고 있으니까 자존심이 되게 상하더라. 고생도 많았고. 그래서 어느 날은 막 울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와서 너 왜 울고 있냐, 한국에서 제작도 하고 그랬는데 이런 일 하니까 화가 나서 울고 있지? 너 여기 일 그만 하고 자기랑 같이 제작일 하자 그러더라. 그래서 난 일을 좀더 배워야 될 것 같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워너의 월드와이드프로덕션 부서, 그러니까 제작·투자·판권구매 부서로 나를 소개시켜줬다. 거기에서 일년 반을 근무했는데 그때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시나리오들을 다 본 것 같다. 하루에 200권씩 받아서 처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감당이 안 되지. 열 장으로 해결해야 돼. 앞부분 열장, 뒷부분 열장, 그래도 미심쩍으면 중간 몇 페이지. 하루에 최대 12권까지 영어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나중엔 몇장만 봐도 감이 온다. 지문 몇줄, 대사 몇줄 보고 던져, 던져, 던져. 그렇게 1년 반을 일하면서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러다 2004년 여름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십년도 넘게 알고 지낸 김대우 감독이 같이 영화하자고 꼬셔서 그 말 한마디에 짐 싸들고 돌아온 거다.

-비단길의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회사 이름을 한국말로 짓고 싶었고, 실크로드가 한국어로 뭐지? 하다가 비단길, 좋다 싶어서 무조건 등록하자 그랬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름대로 큰 뜻을 담아, 동양과 서양을 잇는 그런 제목이면 좋겠다 싶어 생각한 거다. (웃음) 그걸로도 놀림 많이 당했다. 비단길이 가시밭길 되는 거 아니냐 뭐 그런….

-모교인 이대에서 영화동아리 누에가 만들어졌을 때, 본인은 85학번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82, 83학번의 대선배들과 함께 앞장서서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학년이. (웃음) 기지촌 여성들을 담은 다큐도 만들었다. 직접 생활도 같이 했다고.
=아니 그런 얘기까지. (웃음) 근데 생각해보니 그때도 내가 그랬던 거 같아. 선배들은 다 말렸는데 내 생각엔 그렇게 찍지 않으면 다큐가 안 나올 거 같더라고. 민들레회라고 수녀님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돌봐주는 곳이 있었는데 혼자 들어가기는 무서워서 친구를 꼬여서 들어갔다. 매일 밤 죽음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후배가 신경안정제를 사줬는데 그걸 먹고 이틀 밤을 울고 불고 했다. 그 다큐 만들어서 KBS 토크쇼도 나갔고 베를린영화제 영포럼상도 타고 상금도 당시 300만원 받고, 이대 총학에서 500만원 지원해줬고 여성학 교수님들이 돈도 주셨고, 그 당시 돈을 무지하게 벌었다. (웃음) 그땐 또 전국 대학에서 데모를 했기 때문에 데모를 하는 동안 틀어놓을 영화가 없어서 우리 영화를 다 가져갔다. 그래서 그 당시 몇천만원을 벌었다. 돈이 너무 많은 거야. 근데 영화는 너무 후진 거지. 난 감독에 재능이 없구나. 돈은 버는데. 그래서 나는 뭘 하면 좋겠냐고 선배한테 물으니까 기획이나 제작하라 그러더라.

-1989년에 처음 영화일을 할 때, 시작은 어디였나.
=선배가 하명중영화제작소를 소개시켜줬다. 2년 있다가 나와서 회사를 차렸다. 만 스물세살이었지. 그 해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기획해서 번돈 500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영화보러 갔다가 영어, 불어 한마디도 못하는데 <퐁네프의 연인들> 사와서 16억원 벌었다. 근데 지방 배급업자한테 사기당해서 다 날리고 다시 시작했다.

-어떤 영화를 앞으로 하고 싶은지.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 좋게 패키지로 꾸려진 영화들, 그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재미가 없다. 남들이 잘 쳐다보지 않는 것, 새로운 것, 그런 것들에 도전해보고 싶다.

-<작전> 외에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가.
=방은진 감독과 한편 하게 될 것 같고, 그 다음엔 큰 액션영화를 한편 하고 싶다.

-방은진 감독과 하는 영화 장르는 뭔지.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주인공은 여자인가.
=아니, 남자다. 나도 여자주인공인 영화 해보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안 하게 된다. 시나리오 고치고 있다 보면 액션이 되고(웃음)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랑말랑한 게 나랑 안 어울리나.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인생이라서 그런가보다.

-취향 문제일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 (웃음)

by 이안애비 | 2008/06/27 04:51 | 경영경제일반 | 트랙백(1) | 덧글(0)

추격자 김수진 대표 인터뷰

 

<추격자> 김수진 대표

이 정도면 된다고? 절대 안 된다

2008.03.20 / 최광희(영화 저널리스트)

어둠을 품은 영화 <추격자>가 관객 수 300만을 넘어섰다. 우여곡절 끝에 이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 한때 무리수로 여겼던 그의 이상한 고집이 뜻밖의 결실을 보고 있다. ‘반드시 된다’는 확신과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뚝심의 프로듀싱이 비결이다.

1967년생 |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 AFI (The American Film Institute) 프로듀싱 과정 졸업 | 조엘 실버 프로덕션 근무, 美 워너브라더스사 제작 및 구매투자부 근무 | 현 영화사 비단길 대표이사 | 영화 수입 <시네마천국> <퐁네프의 연인들> <레옹> 등 | 기획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 기획, 제작 <꽃잎> <나쁜영화> | 제작 <음란서생> <추격자>

최광희 | 냉정히 말해서 언론이 흥행 영화의 제작자에게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맞추는 타이밍이 약간 빠른 편이다. 예전 같으면 4~5백만 명 정도는 돼야 했는데. 충무로가 어려운 데 대한 반대급부적인 관심이랄까?
김수진 | (웃음) 영화가 재밌기도 하지만 이렇게 과도하리만큼 박수 쳐주고 평점이 높은 건, 운도 따르는 것 같다. 워낙 상황이 안 좋다 보니까 우리 영화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것도 같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최광희 | 98년 IMF 직후 주식 벼락 맞은 사람들 기분하고 비슷하지 않을까?(웃음) 지금이 한국영화계의 IMF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3백만 넘었는데, 5백만까지 바라본다고?
김수진 |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기보다 3~4백만 명 들면 사람들이 금방 잊어먹더라. 5백만이 넘으면 굉장히 기억에 오래 남고. <살인의 추억>처럼 이정표를 찍는 느낌이 들려면 상징적인 차원에서 5백만이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최광희 | 투자사들이 처음에는 갸우뚱하다가 밀어보자고 돌아선 계기가 있었나?
김수진 | 1년 내내 시나리오 고치면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투자사들 다 만났다. 다들 안 한다고 했다. 사채를 끌어서라도 하겠다며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밴티지 홀딩스라는 투자사가 처음 만들어졌다. 혹시나 해서 시나리오를 줬는데 바로 하겠다더라. 너무 기쁘긴 했는데, 그땐 워낙 투자 상황이 안 좋아서 제작비를 많이 쓸 수가 없었다. 애초에 40억 원 정도 잡았는데, 30억이면 하겠다고 하더라. 줄이고 줄여봐도 31억5천만 원이 나왔다. 그 예산에 오케이를 하면서도 엄청 오버될 거 알고 있었지.(웃음) 신생회사 밴티지 홀딩스는 오래된 투자사와는 다른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신선한 눈이 있고, 사람들이 다 젊다. 30대 초반의 영화에 대한 새로운 눈 때문에 투자가 가능했던 것 같다.

최광희 | 다른 투자자들이 거부한 이유는?
김수진 | 제일 큰 이유는 어둡고 칙칙하다는 거였다. 연쇄살인마에 출장안마사가 주인공인 영화는 아닌 것 같다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여러 번 미팅도 하고 제작비도 충분히 조절하겠다고 얘기했지만 다들 ‘No’ 하더라. 그 시기 워낙 한국영화 수익률이 낮아서 대부분 눈에 보이는 수익률이 있는, 로맨틱 코미디나 가벼운 영화를 찾았다.

최광희 | 어둡고 무거운 걸로 치면 <살인의 추억>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김수진 | <살인의 추억>은 그래도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있었지. 우리 영화는 아무도 없었다.

최광희 | 그래도 밀어붙여야 되겠다, 반드시 된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왔나.
김수진 | 시나리오를 숨도 못 쉬고 단숨에 읽었다. 그런 시나리오는 굉장히 잘 되더라. 재미있고, 긴장감이 있었고, 관객은 다 알고 엄중호만 몰라서 혼자 뛰어다니는 상황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관객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엄중호를 바라보게 될 것 같았다. 시나리오가 이렇게 재미있다면 영화는 그 이상 나오지 않을까 확신했다.

최광희 | 관객은 영화를 통해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을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오히려 그것이 흥행 포인트가 됐다.
김수진 | 시나리오를 1년 동안 고치면서 사회적인 이슈를 많이 집어넣었던 게 장점이 된 것 같다. 초고는 그냥 잔혹한 스릴러였는데 그렇게 하면 작은 영화가 될 것 같았다.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고 그걸 환기시키면 무겁고 칙칙하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명백해질 것 같았거든.

최광희 | 그래도 잔혹하고 어두운 정서를 유화시키려는 주문은 했겠지?
김수진 | 많이 했지. 초고부터 편집까지 굉장히 많이. 화장실 장면과 개미슈퍼 장면도 나홍진 감독과 엄청난 논쟁 끝에 30~40%를 들어낸 거다. 나 감독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잘못하면 하드코어 스릴러나 컬트영화처럼 보이게 될 우려가 있어서 최대한 잘라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1차적으로 많이 걸렀고, 촬영과 편집 단계를 거치며 또 걸러냈다.

최광희 | 엄중호와 지영민의 막판 격투 장면에 쓰인 도구가 원래는 망치가 아니라 죽은 미진의 머리통이었다고?
김수진 | 1년 내내 그걸 가지고 싸웠는데, 나 감독이 1년 내내 안 고친 대목이었다. 콘티 때도 안 바꿨다. 그 장면 촬영 전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 감독 숙소에 찾아가 세 시간을 기다려서 세 시간을 얘기했다. 결국 합의가 됐다. 사람 사체로 영민 머리를 치는 장면이 나오면 영화가 다른 장르가 된다. 관객은 중호의 마음으로 영민을 처단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감정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고, 가장 중요한 건 심의가 안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여러 얘기를 서너 시간에 걸쳐 했다. 결국 나 감독이 오케이를 했다.

최광희 | 영화를 하면서 투자자에게 거절당하면 자신감이 떨어지지 않나. 회의감도 들고.
김수진 | 무지하게. 자존심은 많이 상하는데, 오히려 기가 꺾이는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은 도대체 시나리오를 볼 줄 아는 거야 뭐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 두고 보자 하는 오기가 생겼다.


최광희 |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 투자자들이 시나리오 볼 줄 모른다는 게 맞네.
김수진 | 그렇게 얘기하면 오만한 건데.

최광희 | 이 작품 안 된다고 했던 투자자들,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것 아닌가. 돈 가진 게 다가 아니라 작품을 보는 눈도 중요한 건데 말이지.
김수진 | 다 임자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안 된다고 한 작품이 흥행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우리 영화를 ‘뺀치’ 놨던 사람들의 기준과 원칙은 다른 영화에 꽂혀 있었겠지. <추격자>는 밴티지 홀딩스 같은 새로운 투자사가 아주 신선하게 잘 찾아낸 경우다.

최광희 | 캐스팅 관련 얘기가 많았다고 들었다. 김윤석이라는 카드에 대해선 거부감이 없었나.
김수진 | 없진 않았다. 김윤석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그런데 김윤석-하정우 카드를 동시에 밀어붙였다면 분명히 안 됐을 것이다. 김윤석과 서영희를 먼저 캐스팅해놓고 나중에 하정우를 캐스팅했는데, 투자사는 다른 한 명 정도는 스타로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영민 역까지 스타 캐스팅을 안 하고 적역 캐스팅을 하겠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안 된다고 반대를 많이 했다.

최광희 | 그렇다면 투자자들이 하정우 대신 거론한 배우들은 누구였나?
김수진 | 있지만 얘기하면 안 된다. 지금 쓰면 안 돼. 정말. (웃음)

최광희 | 개런티는 얼마나 줬나?
김수진 | 2억 원 위아래. 그 정도면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최광희 | 시나리오도 뛰어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하정우 카드를 고집한 이유는?
김수진 | 그건 논리적인 답이 없다. 역할에 잘 어울리는 적역을 캐스팅한다는 게 이 영화의 원칙이었다. 영민 역엔 무조건 하정우 씨라고 생각한 건 그 선한 얼굴에 영민 역을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 이상한 고집이었지.

최광희 | 편집하는 과정도 남달랐다면서?
김수진 | 만날 가서 괴롭혔다. 모든 후반작업을 한 달 안에 해야 하고 2주 안에 편집을 끝내야 하는 시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감독과 생각이 다르니까 논쟁 과정이 길었다. 고쳐놓으면 다시 가서 보고, 다시 논쟁하고 또 고치고.

최광희 | 배급 일정 가지고도 설왕설래가 있었지?
김수진 | 원래 내가 설 연휴 때 가겠다고 큰소리쳤지.

최광희 | 그때 안 붙인 게 천만다행이네.
김수진 | (웃음) 그게 운이라니까. 당초 개봉 시점을 1월 말로 잡았던 것은 설 연휴라는 의미보다, 2월 한 달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쇼박스에는 1월 30일 개봉이니까 무조건 날짜를 비워 놓으라고 얘기를 했는데, 촬영이 늦어지면서(웃음) 다시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못 맞춥니다 그랬지. 쇼박스도 합리적이었다. 그 시기를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오히려 전략을 잘 짜겠다더라.

최광희 | 이 영화는 무조건 된다는 확신, 언제 갖게 됐나?
김수진 | 촬영 전에 전체 리딩 했을 때. 리딩 하는 걸 두 번 연속 듣고는 이 영화 되게 흥행할 것 같다고 그랬다. 영화 너무 재미있고, 김윤석과 하정우 연기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 때 90% 이상 확신을 가졌다. 그 후 매일 텔레시네를 보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잘 찍혀 오더라. 현장 편집본 보니까 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보면 액션과 리액션이 잘 붙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이 정도 반응일 줄은 사실 몰랐다.

최광희 | 감이 남다른 건가?
김수진 | 운이 진짜 좋았다.

최광희 | 성공한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꼭 이러더라.
김수진 | (호탕하게 웃음) 아니, 진짜 운이 좋았다니까!

최광희 | 어느 정도의 안목이 없었다면 밀어붙일 수 없는 시나리오다. 미국 워너브라더스 사의 월드와이드 부서에서 시나리오 검토 일을 했던 것이 바탕이 됐을 텐데.
김수진 | 굉장히 도움 많이 됐다. 시나리오를 하루에 열 권 이상씩 읽고 그렇게 트레이닝 했던 거, AFI(미국영화연구소)에서 공부했던 것도.

최광희 | 결국 관건은 좋은 시나리오다.
김수진 | 나는 배우고 감독이고 별로 안 본다. 시나리오만 본다. 그 시나리오가 영화적으로 재미가 있으면 그 다음엔 감독을 본다. <추격자>는 그 기준에 딱 맞아 떨어진 합이었다.

최광희 | 나홍진 감독과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수진 | 단편영화 <완벽한 도미요리>를 보고 나서 그랬다. 무조건 저 감독 잡아와! <음란서생> 제작실장이 그 영화의 PD를 했다길래 빨리 데려오라고 했다. 같이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 보니까 다른 영화사랑 감독 계약을 몇 번 했는데 진행이 안 돼 풀이 죽어 있더라. 한 6개월 정도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서 뭘 하고 있느냐 물었더니 <추격자>의 근간이 되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더라. 그리고 2006년 1월에 제목도 없는 초고를 가져왔다. 보고 정말 토할 뻔 했다. 숨도 못 쉬고 너무 빠른 시간에 긴장을 하고 봐서. 너무 재밌었다. 어쨌든 시나리오는 많이 고쳐야겠다, 서로 믿고 한번 해보자고 했다. 나 감독도 기분 좋게 “<살인의 추억>을 뛰어넘게 해주세요”하더라.

최광희 | 나 감독이 영화적인 야심이 큰 인물 같다.
김수진 | 나홍진 감독은 천재다. 당장 미국 가서 영화 해도 굉장히 잘 만들 것 같다.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푸는 데 있어서 그만큼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지. 어떻게 찍어서 어떻게 붙일 때 관객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다 알고 있다. 영화를 많이 봐서 트레이닝된 건지, 아니면 원래 천부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정말 천재다.

최광희 | 한국에 돌아와서 제작자로 두 편을 했다. <음란서생>도 잘 됐고, 야구로 치면 2연타석 홈런이다.
김수진 | 적게 해서 그런 것 같다. 일 년에 서너 편씩 하는 제작사도 있는데, 우리는 2년에 한 편꼴인데, 뭐.

최광희 | 그만큼 신중한 건가?
김수진 | 신중하다기보다 꼼꼼하게 따지는 것 같다. <추격자>를 보면 모든 인물들이 다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나. 그런 걸 보여주면서 우리까지 대충대충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마다 이게 최선인지 다른 대안이 없는지 고민했다. 나 감독 불평 한마디 없이 고치고 또 고치고.

최광희 | 기획자 또는 제작자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나?
김수진 | 제작자가 하는 일이 만 가지라고 했을 때 그 중에 천 가지는 선택을 하는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작자가 선택을 할 때 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할 때도 제목을 <추격자>로 붙이고 나니까 굉장히 명확해졌다. 본능적인 추격 드라마이고 더 나쁜 놈을 나쁜 놈이 쫓아가서 잡는 얘기다. 이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뭘까 하는 데 있어서 원칙적인 타협을 하지 않은 거지. 캐스팅도, 예산도, 하나도 타협하지 않았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물론 결과가 이렇게 안 나왔으면 바보가 됐겠지만.

최광희 | 당신 영화는 흥행했지만 요즘 충무로가 많이 어렵다는 걸 체감하나?
김수진 | 작년 한국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이 손익분기점을 못 넘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이 영화 시작할 때만 해도 촬영하고 있는 영화가 거의 없었다. 투자를 못 받으니까. 정말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많이 느껴진다.

최광희 | 관객들의 선택이 이전보다 많이 까다로워졌고, 배우의 면면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다.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다.
김수진 | 관객들의 눈이 높아지는데 투자사나 제작사들은 여전히 편안하게 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이 캐스팅이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진짜 위험한 거다.

최광희 |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문화기획자로서 프로듀서의 방향성도 더욱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김수진 | 어떤 게 새로운 건지, 어떤 게 더 좋은 건지 아무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장르나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과감한 투자 환경이 돼야 한다. 투자자들도 워낙 많이 깨지다 보니까 리스크가 두렵고 자꾸 안전하게만 가려고 한다. 그런데 안전하게만 가니까 깨지는 폭이 더 커진다. 영화는 정말 답이 없는 것 같다. 기획자나 제작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그 확신만큼의 노력으로 뒷받침을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놓고 관객들이 들기를 바라야 한다. 웰 메이드도 못해놓고 이 정도면 될 거라고 자꾸 들이밀면 투자자나 제작자 모두에게 상처다.

최광희 | <추격자> 리메이크 판권 계약은 어떻게 진행이 됐나?
김수진 | 처음부터 미국 쪽에서 좋아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리메이크 판권을 적극 추진한 가운데 미국에서 스튜디오 담당자들 대상으로 시사회를 두 번 했다. 워너 쪽에서 관심을 보였고, 아카데미상을 받은 각색자가 각색을 하기로 계약하고 100만 달러에 팔기로 했다. 우리가 요구한 가격 그대로 오케이가 됐다.

최광희 | 다음 영화 <작전>은 누가 연출하나?
김수진 | 신인 이호재 감독이다. 한국에서 광고를 오래 했고, 미국에서 마이클 베이가 졸업한 아트센터 영화과를 나왔는데, 다른 대기업에서 감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6개월을 꼬셨다.

최광희 | 일단 마음에 들면 6개월은 꼬시고 보는군.
김수진 | (호탕하게 웃음) 갑자기 그런 사람이 됐네. 6개월 꼬셔도 안 넘어왔는데, 어느 날 “저 시나리오 쓰게 책상 하나 주세요” 하더라. 냉큼 방 만들어줬다. 일주일 정도 뒤에 물어봤더니 주식으로 사기 치는 사람들 얘기기에 그날 바로 계약했다. 하이스트 장르라고 해야 하나? <오션스 일레븐> 같은. 2008년 겨울 개봉을 예상하고 있다.

최광희 | <추격자>도 그렇고 <작전>도 그렇고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김수진 | 나는 멜로가 잘 안 된다. 개인적으로 선이 굵고 사회적으로 할 얘기가 많은 영화 쪽으로 가게 된다.

최광희 | 아무래도 대학 다닐 때 돌 좀 던지신 것 같은데?
김수진 | 많이 던졌지.(웃음) 드디어 들통났네. 내가 광주 출신이고 중학교 때 5.18을 겪었다. 대학 시절도 내내 민주화 운동의 절정기였다. 지금 그 얘기를 하니까 그런 성장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광희 | 최근 충무로 제작자들은 우회상장 등에 골몰하면서 기획력보다 머니 게임에 치중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기획의 에너지가 소진돼버린 게 아닌가 싶다.
김수진 | 다행인 게 나는 돈을 잘 모른다. 주식도 모르고 우회상장도 모르고. 머리가 나빠서 오히려 영화만 하게 된다. 선배 제작자들이 우회상장에 신경을 쓰면서 그분들로부터 서서히 좋은 영화가 안 나오는 게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광희 | 개인적으로 자산가는 아닌 것 같다.
김수진 | 나, 월세 산다.(웃음)

최광희 | 지금이 살아온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점인가?
김수진 | 그럴 수도 있겠다. 물어보니까 그러네. 행복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사실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없고 피곤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by 이안애비 | 2008/06/27 04:27 | 경영경제일반 | 트랙백 | 덧글(1)

콘솔게임社·미디어업체들도 온라인시장 눈독

해외시장은

해외 온라인 게임시장의 상황도 국내 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각적인 M&A와 대기업들의 진출로 시장 판도가 격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풍의 핵은 콘솔 게임업체들의 온라인 게임 시장 진출이다. 실제 액티비전은 온라인 시장 공략을 위해 블리자드와의 합병을 결정했고, EA도 테이크투 인수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 게임 시장에 보수적이었던 닌텐도도 내부 지적재산(IP)을 활용해 온라인 게임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콘솔 게임과 온라인 게임은 개발방식 노하우 등이 판이하게 달라 사업 전환이 어렵기 때문에 콘솔 게임업체들이 개발력을 갖춘 중소 온라인 게임업체 인수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미디어 업체의 게임 산업 진출도 눈에 띈다. 세계적인 미디어그룹 바이어컴, 디즈니 등이 잇따라 게임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의 시장 참여는 케이블 방송, 애니메이션, 음반 사업 등과 게임 사업을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어서다. 이병욱 넥슨 해외사업개발림장은 “다양한 게임 플랫폼을 확보하고 있는 대형 미디어 업체들이 개발사를 인수하거나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사업을 확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슈화 되지 않는 중소 업체간 M&A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세계 시장을 석권한 블리자드의 ‘와우’ 출시이후 개발비 200~300억원 이상의 대작 게임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는 업체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노혁이 엔씨소프트 해외전략팀장은 “온라인 게임은 서비스 노하우가 없으면 백전백패”라며 “이 때문에 개발력이 있고 우수 IP를 보유한 중소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M&A는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임지훈

by 이안애비 | 2008/06/27 02:47 | 게임 Biz | 트랙백 | 덧글(0)

블로깅 시작~

그동안 머 이런 저런 사정으로 닫아두었던 블로그를 다시 연다.
어차피 누가 와서 보지도 않는 블로그였기 때문에 닫아둘 필요까지 있었겠는가만은... 그래도 하는 일이 그렇다보니 어쩔수 없었다.
이제 조금 더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별로 기대할것은 없다. 그냥 편하게 하기로 했다.
즐겁게 한다는것이 쉽지 않다는것을 안 이후니깐...

by 이안애비 | 2008/04/15 08:38 | 트랙백 | 덧글(0)

블리자드가 걸어온 길

정보제공 차원에서 올려봅니다. 나도 가끔씩 볼려고 올리는거니깐 머...
참고로 이 사람들도 엄청난 시행착오끝에 이 자리까지 오게됩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지요.
실패가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 실패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할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해봅니다.
세상 쉬운게 없는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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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블리자드 창립 3인방인 앨런 애드햄, 마이크 모하임, 프랭크 피어스.

 

 

블리자드는 1991년에 만들어졌다. 1991년 앨런 애드햄, 마이크 모하임, 프랭크 피어스 3인방이 실리콘&시냅스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회사가 지금의 블리자드다. (현재 대외적인 업무는 블리자드 대표인 마이크 모하임과 부사장인 프랭크 피어스가 맡고 있다. 앨런 애드햄은 블리자드 회장이지만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다.) 

 

회사 설립 초기 이들은 당시 최고의 멀티미디어 PC로 호평을 받던 '아미가' 플랫폼으로 <반지의 제왕> <배틀 체스 2: 차이니스 체스>를 개발했다. 또 <&롤 레이싱> <로스트 바이킹> 등을 인터플레이를 통해 출시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당시의 실리콘&시냅스’는 인터플레이의 보잘것 없는 서드파티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아미가가 시장에서 주류 플랫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호환성도 좋지 않았다는 점은 치명적이었다. 범용적인 플랫폼이 되지 못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안에 들어가는 게임도 빛을 못보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무도 이 회사를 주목하지 않았다.

 

1985년에 첫 선을 보였던 아미가 PC. 주류 플랫폼이 되지 못했다.

 

 

3년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3인방은 1994년에 회사이름을 실리콘&시냅스’에서 '카오스 스튜디오'로 변경한다. 그리고 같은 해 다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을 바꾼다. '카오스 스튜디오'라는 이름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후 블리자드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같은 해인 1994년 블리자드는 '데이비슨&어소시에이츠'라는 유통사에 1,000만 달러에 매각된다. 매각된지 얼마되지 않아 PC 플랫폼으로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출시한다. 당시 부재는 '오크와 휴먼'이었다.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를 통해 처음으로 성공의 단맛을 본다. 하지만 대중적인 성공은 곧 비난으로 이어졌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RTS)의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듄 2>가 나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형태의 게임인 <워크래프트>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게이머들은 블리자드가 <듄 2>를 베껴서 <워크래프트>라는 게임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블리자드가 <워크래프트>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듄 2>의 아류작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로 RTS 장르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후 시리즈를 만들어간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워크래프트 2>다.

 

블리자드라는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린 작품 <워크래프트 2>.

 

블리자드는 이듬해인 1995년에 <워크래프트 2>를 발매하고 같은 해에 확장팩인 <워크래프트 2: 비욘드 더 다크 포털>을 출시한다.

 

<워크래프트>가 북미 지역에서 히트했다면 <워크래프트 2>와 확장팩은 전세계적으로 블리자드의 이름을 알린 게임이다. <워크래프트 2>는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도 꽤 많은 유저들이 플레이한 게임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여전히 웨스트우드라는 개발사가 이름을 날릴 때다. 앞에서도 말한 <듄>이라는 게임으로 RTS 장르를 개척하고 <커맨드&컨커>로 최고의 명성을 날릴 때다. 또 <워크래프트 2>가 나온 비슷한 때에 국내에는 웨스트우드의 또 다른 RTS 게임인 <레드얼럿>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

 

블리자드는 1996년 <디아블로>를 만들던 '콘도르게임즈'를 인수한다. 블리자드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러던 중 1996년에 <디아블로>를 개발하던 '콘도르게임즈'를 인수해 블리자드 노스라는 이름으로 변경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블리자드 노스는 이후 블리자드의 보배가 된다. <디아블로> 이후 <디아블로 2>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997 1월에는 패키지게임을 온라인에서 즐길 수 있는 배틀넷 서비스를 개발한 곳도 블리자드 노스다.

 

블리자드 노스는 블리자드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준다. 특히 배틀넷의 개발은 당시 혁신에 가까웠다.

 

 

배틀넷: 블리자드 노스에서 1997년 만든 게임 네트워크 시스템.

 

1997년 처음 서비스를 시작해 첫해에 125만 유저가 배틀넷을 통해 2,200만 게임을 했다. 이때 매일 평균 3,500명이 신규가입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1999 4월에는 230만명의 액티브 유저가 배틀넷을 통해 게임을 즐겼고 동시접속자 수가 5만명을 돌파하는 등 큰 인기를 누린다.

 

2002 9월에는 액티브 유저가 1,100만명으로 늘었고 2004 9월에는 1,200만명이 됐다. 이때 매일 210만 시간의 플레잉 타임을 기록했고 평균 동접이 20만명, 최고동접이 40만명에 이른다.

 

<디아블로> 시리즈와 <워크래프트> 시리즈, <스타크래프트>가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배틀넷의 힘이 크다.

 

 

 

블리자드는 1996 'CUC 인터네셔널'이라는 레저회사로 경영권이 넘어간다.

 

1997년에는 '센던트 소프트웨어'라는 부동산 레저그룹에 경영권이 넘어간다. 하지만 회계부정사건이 터지고 '센던트 소프트웨어'의 주식이 폭락하면서 경영권이 다시 프랑스 회사인 '하바스'로 넘어간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97년 프랑스의 비벤디 그룹에 인수된다. 물론 지금은 비벤디의 계열사 중 하나인 VUG(비벤디 유니버셜 게임즈)의 대표적인 자회사가 됐다.  

 

블리자드는 1997 <스타크래프트>를 발매해 그해 최고의 PC게임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는다.

 

이후 1999년에 <워크래프트 2: 배틀넷 에디션>을 출시한다2000년에는 <디아블로 2>를 출시해 또 다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디아블로 2>는 블리자드 최고의 히트상품이다. 전세계적으로 1,450만 카피가 팔렸다. 950만 카피가 팔린 스타크래프트보다 월등한 성적이다. 블리자드가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은 <스타크래프트> 보다 오히려 <디아블로 2>의 공이 컸다. 물론 e스포츠가 활성화된 지금은 약간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2002년에는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카오스>를 출시하고 2003 <워크래프트 3: 프로즌 쓰론>를 잇따라 출시해 RTS의 명가로 자리매김한다.

 

세계 최고의 온라인게임으로 자리매김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은 블리자드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준 게임이다.

 

블리자드가 승승장구했지만 모회사인 비벤디는 그룹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자연스럽게 자회사인 VUG가 매각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것도 이때다. 이 시기에 블리자드의 주옥 같은 개발자들이 많이 나가게 된다. 물론 일부 경영진들도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딛고 블리자드는 2004년에 온라인게임 업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출시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출시와 함께 미국, 한국, 중국 등에서 엄청나게 흥행하며 어려움을 겪던 VUG의 재무재표 곡선을 바꿔놓는다.

 

VUG는 2006 3분기 매출은 1 8,200만 유로로 지난해 동기대비 15% 증가했다. 와우의 영향이다. 현재 블리자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통해 900만명의 라이브유저를 확보하고 있다

 

VUG가 비록 어려움을 겪었지만 철학에 대한 원칙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다. VUG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자회사인 블리자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블리자드의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게임이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다.

 

2005년에는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를 콘솔게임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개발사 스윙인 에이프를 인수한다. 하지만 콘솔게임은 개발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현재 스윙인 에이프는 '블리자드 콘솔'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어서 차세대 콘솔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블리자드는 만족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면 유저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출시를 연기한다. 솔직히 말해 출시연기를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출시연기는 블리자드의 철학이다. 게임 완성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절대 제품으로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블리자드의 철학은 훌륭한 완성도의 게임으로 나왔고 결국 블리자드빠를 양산한다.

 

2005년에는 블리자드 노스가 문을 닫는다. <디아블로>를 만들었던 개발자들이 신생회사를 설립하면서 속속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회사가 빌 로퍼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플래그십스튜디오로 현재 <헬게이트: 런던>을 개발하고 있다.

 

2006년 5월에는 <스타크래프트 2>를 발표했다. 또 지난 8월 초에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2번째 확장팩인 <리치왕의 분노>를 공식발표했다.

 

이 두 게임이 언제 나올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블리자드는 제품출시를 수시로 연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세계 게임 팬들이 출시연기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개발한다. 유저들은 훌륭한 게임을 원하기 때문이다."라는 블리자드의 철학은 지금의 블리자드를 만든 원동력이다.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더욱 인기를 얻는 것이 블리자드 타이틀의 특징이다. <스타크래프트 2>는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까?

 

 

블리자드가 지금까지 출시한 타이틀

 

1992년 로스트 바이킹

 

1994년 록&롤 레이싱

        대스 앤드 리턴 오브 슈퍼맨

        블랙쏜

        워크래프트

 

1995년 로스트 바이킹 2

        저스트 리그 태스크 포스

        워크래프트 2

 

1996년 워크래프트 2: 비욘드 더 다크 포털

        디아블로

 

1998년 디아블로: 헬파이어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1999년 스타크래프트 배틀체스트

        워크래프트 2 배틀넷 에디션

 

2000년 디아블로 2

 

2001년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

       디아블로 2 배틀체스트

 

2002년 워크래프트 3

 

2003년 워크래프트 3: 프로즌 쓰론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카오스

 

2004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2007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불타는 성전

 

*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는 미궁에 빠짐

 

출저 디스이즈게임

by 이안애비 | 2008/04/15 08:36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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